♠ 산/떠 나 볼 까

강학대 (講學臺) /경남 양산

soongmc 2017. 6. 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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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익은 강학대 외에도 관가의 창고 옆 연못가에 창포정(菖蒲亭)을 건립하여 여가 때마다 고을 자제들을 강학했고, 군민들은 이여익을 위해 거사비(去思碑)를 두 곳에 세웠다고 한다. 현재 양산시 강서동 교리 양산향교 내에 1649년에 세워진 이여익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남아 있다.

강학대는 1733년 이곳을 자주 완상하며 노닐었던 양산군수 이흡(李潝)에 의해 ‘사인암(舍人巖)’과 ‘학사계(學士溪)’라는 명칭이 더해졌다.

강학대는 여러 문사(文士)들이 유람하며 완상하였다. 1986년 발간된 『양산군지』에는 문헌공(文憲公) 월담(月潭) 최황(崔滉)이 이곳에서 유상(遊賞)한 바 있다고 했으며, 또 구계(龜溪) 정인휘(鄭寅暉)와 소계(少溪) 김상원(金庠源)의 한시가 소개되어 있다. 『양산의 누정재지』에는 1876년 9월 양산군수로 부임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가 지은 「사인암에서 노닐다[遊舍人巖]」가 소개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舍人巖卽侍郞臺 亦不記諸學士來 有鳥啼情難解語 無人間蹟欲停杯 石屛屹立山腰隱 澗水爭流洞口開 白馬光陰春夢跡 稿千年石石何灰 上元赤牛夏 是隱]”


“사인암은 곧 시랑대인데/ 여러 학사가 왔어도 기록하지 않았네/ 새들은 정을 노래하지만 그 뜻 알기 어려워/ 인적 없는 이 산 속에서 나는 술잔을 멈춘다/ 돌 병풍 우뚝 솟아 산허리는 숨었는데/ 골짝 물은 다퉈 흘러 동구를 열었구나/ 백마같이 빠른 세월, 봄꿈의 자취로다/ 천년 바위에 글을 쓰니 바위가 얼마나 넓은지

정축년 여름에 시은이 쓰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야관문(비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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