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1.30 03:03 | 수정 : 2012.01.30 03:05
최다영양, 정책금융공사 합격
1등 놓치지 않고 자격증 9개… "내힘으로 집 사는 게 꿈"
최다영양(오른쪽)은 “어렸을 때는 왜 나만 불행할까 원망도 많이 했지만, 그런 환경이 자립심을 키우고 악착같이 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해 여름 부산 송정해수욕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

"너무 경쟁이 치열해서 합격은 생각도 못 했는데…. 열심히 일하고 돈 모아서 언젠가는 제 힘으로 집 사는 게 꿈이에요."
금융 공기업 정책금융공사의 고졸 공채에 합격한 최다영(19·영천 성남여고)양은 사투리가 섞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업은행의 정책 금융 부문을 떼낸 이 회사는 이른바 '신이 부러워하는 직장' 중 하나다. 올해 대졸 신입 사원 경쟁률 114대 1에 국내외 명문대 석·박사 출신도 줄줄이 낙방하는 곳이다.
이 회사가 처음 실시한 고졸 공채에 65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자 5명 안에 든 것도 대단한데, 그는 또 다른 사연을 갖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지만, 어떤 시련도 홀로 서겠다는 의지를 꺾지 못했다.
경북 영천이 고향인 최양은 일곱 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공장에 다니던 아버지가 3남매를 키우다 최양이 열 살 되던 해 갑자기 배를 타겠다고 떠났다. 일곱 살 위 언니와 두 살 위 오빠 등 3남매만 덩그러니 남았다. "언니마저 못 견디고 집을 떠났을 땐 정말 막막했어요." 엄마와 다시 연락이 돼 몇 달을 함께 살았지만, 결국 영천희망원에 맡겨졌다. 내성적이던 오빠는 희망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이 오히려 소녀의 오기를 자극했다. "복지시설에 있다 보니 돈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니며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위안이 됐어요. 가족이 아무도 없으니 내 힘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후원자나 선생님들에게 처음으로 관심과 사랑도 받아 행복했어요."
하지만 불행은 계속됐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려서 워낙 고생해서 웬만한 일엔 끄떡도 안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엔 충격이 컸어요."
가난에서 벗어나 독립해 살아가려면 돈을 많이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실업계 고교로 진로를 정했다. 영천 성남여고에 진학해 3년 동안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전산 회계 등 자격증만 9개를 땄다. 3년간 관악부 악장도 맡았다.
학교 선배들은 졸업 후 대부분 대기업에 생산직으로 취업했다. 실력과 운이 좋아 금융회사에 취업한다 해도 창구 직원으로 입사해야 해, 대졸 사원과 같은 관리자로 크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현실의 벽을 절감한 최양은 더 큰 꿈을 위해 고3 막바지에 진로를 진학으로 바꾸고, 악착같이 수능을 준비해 작년 말 영남대 경영학과 합격증을 받았다.
그런데 작년 하반기부터 상황이 변했다. 금융감독원이나 산업은행 같은 좋은 일자리의 기업들이 고졸 사원들을 대거 뽑기 시작했다. 최양은 '자립 시기를 앞당길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최양은 지난해 처음으로 고졸을 뽑은 정책금융공사에 입사 원서를 냈고, '간판'이 아닌 '실력'으로 기회를 잡았다. 공사 관계자는 "다영양은 필기시험 성적이 우수할 뿐 아니라 면접에서도 밝고 자신감이 넘쳤고, 다양한 특기와 사회봉사 활동을 한 것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최양은 3월 초까지 연수를 받은 다음 현업에 배치돼 다른 대졸 직원들과 똑같은 일을 하게 된다. 연봉은 대졸 출신보다 30%쯤 적지만, 나중에 야간대학에 진학해 졸업장을 따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최양은 서울에 방을 빌려 자취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후배들도 실업계 출신이라고 기죽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인생을 개척하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산업계, 금융계의 학력 파괴 바람은 올해 더 거세질 전망이다. 29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한전, 토지공사, 철도공사 등 주요 공기업은 고졸 채용 비율을 크게 늘려 올해 채용 인력 4000여명 중 30%인 1200여명을 고졸 중에서 뽑기로 했다.
은행 중에서도 근무 태도가 성실하고 실적이 좋은 청원경찰이나 창구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고졸 출신을 임원급 간부로 발탁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은행은 최근 인천 송도지점 청원경찰 정민혁씨를 정식 행원으로 재채용했다. 본연의 보안 업무뿐 아니라 친절한 상담과 안내로 지점 영업 실적 향상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다. 또 산업은행은 지난 24일 사상 처음으로 지역 본부장에 고졸 출신 2명을 발탁하고, 신규 임용 지점장 20명 중 11명을 고졸 인사로 발탁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학력 파괴 바람과 더불어 최양과 같은 인생 역전 드라마를 더 자주 볼 수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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